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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저 아저씨는 남자야, 여자야?”
어머니는 답이 없었다. 아이가 다시 말했다. “근데 수염이 엄청 길어.” 어머니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어머, 그러게….” 난 해명을 포기했다. 정면만 뚫어지게 노려본다. 조선의 자랑스러운 장군, 수문장(守門將)의 위엄을 눈빛으로 보여주기 위해!
둥! 둥! 둥! 서울 시청역 1호선 인근에10원야마토게임
서 하루 2번 들려오는 세 번의 북소리. 수문장 교대 의식을 알리는 ‘개식 타고’다. 수문장은 조선 시대 왕이 기거하던 궁궐 정문을 지키는 무관(武官). 서울시는 1996년부터 덕수궁 대한문에서 ‘왕궁 수문장 교대 의식’을 재현하고 있다. 매일 오전 11시와 오후 2시, 월요일은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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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구 대한성공회빌딩 건물 지하 1층. 입구 선반에 나란히 놓인 챙이 둥근 반구형 모자가 보였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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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판 무관들이 한숨 돌리는 대기실이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교대식 전후로는 대한문 앞을 지키는 수위군이 ‘수위 의식’을 선보인다. 본 행사 전 관광객을 기다리며 맞아주는 역할. ‘왕궁 수호대’가 되어 바라보는 서울 한복판의 풍경은황금성갈갈이
어떨까. 나도 한번 서보기로 했다. 그런데 웬걸, 묵묵히 서 있기만 하는 수위군 역할인 줄 알았는데 덜컥 현장에서 장군 역할이 주어졌다. 허허, 내가 장군이 될 상인가? 낮 최고기온 27.3도, 3시간처럼 느껴졌던 까마득한 30분 속으로.
◇나는 장군이올시다
오후 2시쯤, 서울 중구 대한성공회빌딩 건물 지하 1층. 현대KJ프리텍 주식
판 무관들이 한숨 돌리는 대기실에 도착했다. 입구 선반에 나란히 놓인 챙이 둥근 반구형 모자가 보였다. 사극에서 자주 봤던 것 같다. 조선 시대 무관이 착용하는 모자 ‘전립(氈笠)‘. 대기실 내부는 시원했으나 날이 후덥지근하다.
조유미 기자(오른쪽)가 '수위군 선배' 임연(30)씨에게 역할 설명을 듣고 있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조선시대 문무관이 입던 군복인 ‘구군복’ 입는 모습.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자, 수위군을 이끄는 장군 역할을 맡을 거예요.” 교대 의식을 총괄하는 윤명호 예술감독이 말했다. 헛, 뭐라고? 이곳 인원은 크게 두 그룹으로 나뉜다. 수문군·수문장·취타대 등 교대 의식에 참여하는 본대(本隊)와 대한문 앞을 호위하는 2명의 수위군이다. 과거 수문장까지 3명이었으나 인력이 부족해지며 역할이 사라졌다고 했다.
당초 30분마다 교대를 하는 수위군을 맡기로 했다. 본대는 동선과 절차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수문장이라니.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수위군을 이끌며 가장 먼저 앞장서 가야 하는 데다 무려 ‘멘트’가 있었다. 내가 서기로 한 시간인 오후 3시까지 남은 시간은 단 50분. 20년 이상 경력의 베테랑 전용기(41)씨가 “앞으로 전진할 때 ‘향전’, 멈출 때 ‘정위’, 마주 보고 설 때 ‘향좌우립’, 자세를 잡을 때 ‘입취’라고 외치면 돼요. 어렵지 않죠? 하하”라고 했다.
하하, 어려운데요? 고작 네 마디지만 눈앞이 캄캄하다. 장고 끝에 커닝을 위해 볼펜을 들고 손바닥에 쓰기 시작했다. 내 구령에 맞춰 뒤따르는 수위군이 환도(군복에 차던 군도)를 들거나 내리고, 자세를 고쳐 잡는다고 했다. 틀리면 큰일이다. 사색이 된 내가 안타까웠는지 전씨가 “만약 틀리면 안 틀린 척하시라”며 “우리가 알아서 하겠다”고 했다. 그때 한 초등학생이 무관 복장으로 쫄래쫄래 들어왔다. 일일 체험 ‘나도 수문장이다’ 프로그램에 참여했다고. 성인인 내가 못할 순 없지. 연신 중얼거렸다. “향전, 정위, 향좌우립, 입취….”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 수염을 장착했다.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걱정을 한아름 안고 출격.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내가 장군이 될 상인가
잠깐, 성인이지만 못할 수도 있지 않을까? 걱정을 한아름 안고 출격 준비. 구군복(具軍服)으로 갈아입는다. 조선 시대 문무관이 입던 군복. 등에는 활통을 매고 손에는 지휘봉을 들었다. 그리고 빠뜨릴 수 없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준비해 온 비장의 무기 수염!
“‘투 머치(과함)’ 같은데?” “아냐, 저 정도는 해야 장군이지.” “파이팅 있으시네.” 온라인으로 주문한 4장에 9800원짜리 파티용 수염을 보고 무관들이 기특하다는 듯 수근거렸다. 한 무관이 “아주 작정을 하고 오셨구나”라며 원래 수문장 복장에 없는 길이 90㎝의 환도까지 허리춤에 달아줬다.
그래, 가보자. “내가 왕이 될 상인가”로 유명한 영화 ‘관상’의 수양대군 등장 장면을 상상하며 위풍당당 걷기 시작했다. 대한성공회빌딩 바로 앞 도로에서부터 행진은 시작된다. 날 발견한 행인들이 홍해처럼 갈라지며 길을 터 줬다. 간혹 고개를 갸웃하는 사람도 있었으나(수염 때문으로 추정) 무시하고 일단 걸었다. 지도상 450걸음, 300m도 안 되는 거리가 3㎞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덕수궁 대한문 입구로 향하는 석도(石道). 한가운데 멈춰 문을 바라보고 소리쳤다. “향~전!” 남자 목소리를 내려니 어색하다. 그러나 우렁차게. 앗, 뭔가 잘못됐다. 앞서 근무하던 수위군이 앞쪽으로 나온 뒤 외쳐야 하는데, 마음이 앞서 먼저 소리치는 바람에 동선이 꼬인 것. 그러나 이들은 프로였다. 소란 없이 교대 완료. 수염을 붙여 표정이 드러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아니었다면 울기 직전으로 보였을 것이다. 마음을 다잡았다. 장군은 울지 않는다.
내가 장군이 될 상인가?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허리가 아파온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 /김용재 영상미디어 기자
◇저도 장군이 처음이라서요
허리가 아파온다. 꼿꼿한 자세를 유지해야 했기 때문. 몸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이렇게 힘들구나. 수위군 선배들이 “장군이니 대한문 앞을 수호하듯 걸어도 된다”고 했지만 촐싹대며 걷게 될까 망설여졌다. 어깨가 뻐근할 때마다 지휘봉을 흔들며 조금씩 자세를 바꿨다. 내 뒤 좌우로 각각 서서 꼼짝 않는 수위군은 더 힘들 것이다. 10분에 한 번, 서로 위치를 바꾸며 움직이는 것이 전부.
“장군님, 그 봉은 뭔가요?” 한 청년이 다가와 물었다. 기어 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그 저도 사실 오늘 장군이 처음이라….” 청년이 “몰랐다”며 빵~ 터졌다. 왜인지 뿌듯. 무관의 복장은 당연하지만 더웠다. 땀이 쏟아지며 싸구려 수염이 축축해진다. 덕분에 얼굴에 수염이 착 붙어 흘러내리지 않으니 이것이야말로 전화위복?
더위를 잊게 해준 건 관광객들이었다. 수위군의 등장에 흩어져 있던 외국인들이 대한문 앞으로 몰리기 시작한다. 물 건너온 이들에게 조선의 위엄을 보여주리라. “향~좌우립!”을 쩌렁쩌렁 외쳤다. 여기저기서 “오오” “원더풀!” “판타스틱, 조선 다이내스티(dynasty·왕조)!”라는 찬탄이 쏟아졌다. 조금 전 한국 시민을 웃겼을 때보다 더 뿌듯했다.
◇한국을 알린다는 긍지로
“캔 아이 테이크 어 픽처 위드 유?” 외국인 관광객들은 쉼 없이 “사진을 함께 찍어도 되느냐”고 물었다. 슬쩍 국적을 물으니 일본과 중국은 물론 미국·스위스·베네수엘라·스페인·프랑스 등 다양했다.
3시간 같은 30분이 지났다. 또다시 길거리 시민들을 가르며 대기실로 되돌아왔다. 무관들이 “수고했다”며 맞아줬다. 이들은 오전 9시 30분 출근해 오후 4시 30분쯤 퇴근한다. 인원은 총 45명. 실제 교대·수위 의식을 진행하는 사람은 28명 정도라고 한다. 한 남성은 “한때 행사에 50여 명이 참여할 때도 있었지만 시의 지원이 줄면서 인력이 축소됐다”며 “자부심을 갖고 10년 넘게 일을 놓지 못하던 베테랑들이 가장이 되며 보수 때문에 그만두는 경우도 많아졌다”고 했다.
어려움은 당연하게도 무더위와 추위. 폭염특보가 내려질 정도의 혹서기에는 행사가 진행되지 않지만 짧지 않은 시간 야외에 있어야 하는 만큼 그늘이 드리워지지 않는 시간대엔 곤혹을 치른다고. 술에 취해 멱살을 잡거나 뺨을 때리는 사람도 간혹 있단다. 10개월 차인 임연(30)씨는 “그래도 관광객들이 즐거워하거나 아이들이 힘내라는 말을 건넬 땐 마음이 훈훈해진다”고 했다. 베테랑 전씨도 “매해 더 멋진 의식을 선보이기 위해 동선을 고민하고 전통 행사 관련 전문가를 초청해 지도를 받는 노력을 한다”며 “영국 근위병 교대식 못지않은 한국의 멋진 교대 의식을 알린다는 긍지를 갖고 일하고 있다”고 했다.
무더위 속에서도 자세를 무너뜨리지 않고 자리를 지키는 이들에게서 조선의 격과 서울의 품이 보였다. 회사로 복귀하는 길. 궁궐의 붉은 담장과 공존하는 높고 낮은 빌딩들, 전통의 곡선과 도심의 직선이 뒤엉킨 서울의 풍경이 새삼 눈에 들어왔다. 생각 없이 지나치느라 알지 못했다. 노래를 흥얼거렸다. “서울, 서울, 서울, 아름다운 이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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