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깜깜한 전시장에 들어서면 거대한 화면 속 성전과 마주한다. 언뜻 우주를 유영하는 비행체 같다. 이슬람교와 유대교, 기독교가 치열한 쟁탈전을 벌여온 예루살렘의 고대 건축물 ‘바위의 돔’을 컴퓨터 애니메이션으로 표현한 것이다. 작품은 바위의 돔이 자리한 실제 지역의 이름을 따 ‘알 아크사 공원’(2006)이라 명명됐다. 러닝타임 10분 동안 이 사원은 이리저리 굴려지지만, 아슬아슬한 축 하나에 매달려 쓰러질 듯 쓰러지지 않고, 멈출 듯 멈추지 않는다. 중동 지역의 끊이지 않는 싸움과 분쟁, 폭력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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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암스테르담)’에는 작가인 와엘 샤키가 출연해 12분 45초 동안 쿠란을 읊는다.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서울 삼청동 갤러리 ‘바라캇 컨템포러리’에서는 이집트 출신의 중동을 대표하는 작가 와엘 샤키(54)의 개인전 ‘텔레마치와 다른 이야기들’이 열리고 있다. ‘알 자기차량 아크사 공원’을 필두로 ‘텔레마치’ 시리즈(2007∼2009), ‘동굴(암스테르담)’(2005) 등이 출품됐는데, 대부분 20여 년 전 영상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새롭고, 흥미롭고, 유효하다. 긴말 필요할까. 초입에서 ‘알 아크사 공원’에 압도된 관람객은 와엘 샤키의 우주에 몸을 던질 만반의 준비를 갖추게 된다. 그가 왜 지금 세계 미술계에서 가장 영향력 여유자금법 있는 작가로 꼽히는지, 왜 지난해 그가 초대된 베니스비엔날레 이집트관이 연일 ‘오픈런’ 현상을 일으켰는지,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이다.
“저는 스스로 역사의 통역자, 번역자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최근 갤러리에서 만난 와엘 샤키는 현대미술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 그리고 예술 철학을 이렇게 정리했다. 즉, 그는 다양한 매체를 이용해 서구 2009년주5일제 중심으로 서술된 역사를 재해석하는 데 집중한다. 이때 형식적으로는 재구성, 스토리텔링 기법이 특징이고, 주제적으로는 서로 다른 문화와 규범, 제도가 교차, 충돌, 변화, 융합하는 지점을 탐구한다. 작가의 이런 ‘주특기’가 종합선물세트처럼 오롯이 담긴 건 ‘텔레마치’ 시리즈다. 그중 세 작품(‘텔레마치 사다트’ ‘텔레마치 교외’ ‘텔레마치 쉘터’)을 이번 마이너스통장 발급기간 전시에서 만날 수 있다. 여기서, ‘텔레마치’란 1970년대 서독의 인기 TV쇼에서 가져온 이름이다. 이 방송은 두 마을이 나와 제한 시간 동안 경기를 벌이는 형식이었는데, 유년시절 이를 보고 자란 작가는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 충돌하고 교류하며 만들어내는 오락과 균열을 작품의 구성으로 가져온다.



‘텔레마치 사다트’.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텔레마치 쉘터’는 이집트 서부 사막 한복판에 자리한 진흙 오두막에 아이들이 들어갔다 나오는 모습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는 유목과 정주라는 대척점에 선 생활 풍경을 상기시키며, 현대와 전통 간의 역학 관계를 곱씹게 한다. 또, ‘텔레마치 교외’는 나일강 삼각주 지역의 시골 마을에 한 헤비메탈 밴드가 공연하는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이러한 문화를 접해 본 적 없는 주민들의 표정이 압권이다. 혼신의 힘을 다해 연주하고 노래하는 밴드 앞에서 주민들은 대체로 당황한 기색. 여기에, 약간의 호기심이 뒤범벅된 채로 미지근한 반응을 보여준다. ‘텔레마치 사다트’는 무함마드 사다트 전 이집트 대통령의 장례식을 어린아이들이 재연한 작품이다. 사다트 대통령의 암살은 이집트의 집단 기억에 각인된 사건인데, 이에 대한 정보와 지식, 개념과 판단이 없는 아이들이 웃고 떠드는 모습이 극도의 생경함을 자아낸다. 작가는 역사를 ‘통·번역’한다고 했는데, 텔레마치 시리즈는 감상자에게도 역사를 통·번역할 틈과 공간을 넉넉하게 내어준다. 그것이 가능한 건 와엘 샤키가 아이들을 작품에 자주 등장시키기 때문이다. 작가는 “아이들은 사회적·젠더적 역할에 대한 인식이 느슨하거나 거의 없다. 이들을 주체로 내세울 때 작품이 ‘의도치 않은 해석’을 피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텔레마치 교외’. 바라캇 컨템포러리 제공


‘동굴’ 시리즈 중 하나인 ‘동굴(암스테르담)’도 느닷없고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우리의 눈과 귀, 마음을 깨운다. 이 작품엔 긴박한 소식을 전하는 뉴스 리포터 혹은 잔뜩 열이 오른 래퍼와 같은 모습으로 작가가 직접 출연한다. 지하 1층 벽 한 면을 다 채운 거대한 비디오 속에서 작가는 암스테르담의 한 슈퍼마켓 진열대 앞에 서 있다.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쉬지 않고 그가 읊어대는 건 쿠란의 동굴의 장(카흐프의 장). 한 무리의 신실한 청년들이 신앙적 박해를 피해 동굴로 도망쳤고, 신이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309년 동안 잠들게 했다는 이야기. 유럽의 슈퍼마켓과 쿠란이라는 이질적 요소는 작가의 불안한 음성과 표정을 만나 극대화된다. 세계화가 각 지역의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치며 때로는 부조화를 일으킬 수도 있음을 시사한 작품으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해도 이 낯선 풍광에 빠져드는 데 전혀 무리가 없다. 전시는 4월 27일까지.
박동미 기자 pdm@munhw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