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신비로움을 탐험하는 바다이야기
작성자: 선강보한
등록일: 26-01-07 1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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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이야기
바다는 항상 인류에게 신비롭고 매력적인 주제였습니다. 그 깊고 푸른 바다는 새로운 도전과 발견의 기회를 제공하며, 이러한 매력을 담은 대표적인 콘텐츠가 바로 바다이야기입니다.
바다이야기의 매력
바다이야기는 바다의 아름다움과 다양성을 탐험하는 동시에, 해양 생물과 신비로운 전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이 이야기는 해양 생물의 다양성을 보여주고, 바다에서 찾을 수 있는 보물과 신비로운 세계의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합니다. 이는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탐험과 발견의 여정을 제공합니다.
바다이야기의 가치
바다속의 신비로운 동물들과 환성적인 해저 세계는 끝없는 호기심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킵니다. 바다는 평화와 안정을 주는 동시에 도전과 모험의 기회를 제공합니다. 따라서 바다이야기는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경함하게 하며,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의미를 재고하게 합니다. 이는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고 의미 있게 만들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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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 admin@reelnara.info
때로는 책 한 권이 한 해의 화두(話頭)를 던지기도 한다. 올 초, 정민 한양대학교 교수가 쓴 ‘서학, 조선을 관통하다’를 읽은 후 내게 일어난 일이 그랬다. 마지막 책장을 덮은 뒤 오랫동안 뇌리에 남은 인물이 있었다. 바로 ‘황사영 알렉시오’(1775∼1801)이다.
황사영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임시 과거 시험인 증광시(增廣試)에 16세의 나이로 최연소 합격했다. 심지어 정조가 친히 채점한 두 번째 시험에서도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는 어린 그의 손을 잡으며, 스무 살이 되면 벼슬길로 나와 자신을 도우라고 청했다. 이후 황사영은 야마토게임예시 정조가 잡은 손목에 붉은 명주를 감고 다녔고, 사람들은 감히 그의 손을 만지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조와 다시 만난 황사영은 왕이 기대했던 청년이 아니었다.
건축가 안영배와 박재환은 ‘배의 밑바닥’이라는 뜻의 지명(배론)에 착안해 배를 닮은 두 성당을 설계했다. 성서에서 백경게임 배는 구원의 방주를 상징하지만 배론에 정박한 두 척의 성당은 신유박해를 천지개벽으로 해결하고 싶었던 젊은 황사영의 환영 속 서양 함대를 떠올리게 한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황사영을 바꿔놓은 건 ‘서학(西學)’이었다. 증광시에 합격하기 1년 전, 그는 당대 실학의 거두였던 체리마스터모바일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서학에 천천히 스며든 황사영은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해도 맞으러 나가지 않을 정도로 서학에 심취해 있었다. 1795년에는 사제로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과거 시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평신도로 이루어진 명도회(明道會)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좋은 집안에 어릴 때부터 총명한 머리로 해박한 교리 지식을 황금성슬롯 갖추고 있던 젊은 황사영은 단숨에 조선 교회의 거두가 되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국상이 끝나자 조선 정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했는데, 이듬해부터 천주교인들을 발본색원했다. 신유박해의 시작이었다.
릴게임신천지
황사영이 8개월간 숨어지내며 백서를 썼던 토굴 외부 모습.
배론성지 대성당의 전경.
조선 정부의 추격을 피해 황사영은 배론리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옹기 가게를 운영하는 김귀동이 그를 맞았다. 당시 배론리에는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는데, 대부분의 교우촌이 그렇듯 이곳도 산골짜기 아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김귀동은 토굴을 짓고 그곳에 황사영을 숨겼다. 하지만 황사영이 쓴 ‘백서(帛書)’를 북경교구에 전달하기로 한 황심이 잡히면서 그도 체포되었다. 스스로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토굴로 숨어 들어간 지 8개월 만이었다.
움푹 들어간 세상의 끝에서 그는 ‘백서’를 썼다.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깨알 같은 크기로 1만3384자를 꾹꾹 눌러 담았다. 백서에는 조선 교회의 소개와 순교자들의 일생,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이 실려 있다. 그리고 북경교구장, 구베아(A. de Gouvea) 주교가 교황에게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중국 황제로 하여금 조선을 감독하게 해 달라는 청원이 담겨 있다. 심지어 군대를 태운 수백 척의 서양 함대가 조선으로 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조선 정부를 압박해달라는 요청도 적혀 있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황사영의 백서는 외환죄의 명백한 증거였다. 이후 천주교는 단순한 사학이 아닌 국가 전복을 꾀하는 역모 집단이 되었다.
전도유망했던 황사영이 입신양명의 탄탄대로를 걷어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백서’를 쓰고 스스로 대역죄인이 되게 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그를 열병처럼 휘감았던 ‘신앙심’ 때문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 질문이 올 한 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결국 가을의 문턱에서 충북 제천의 깊은 골짜기, 배론성지를 찾게 했다. 그가 숨죽여 지냈던 토굴 앞에 서서 청년 황사영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했다.
그는 두 평 남짓한 토굴 속에서 조선 교회가 무너져 내리는 참혹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소식통들이 황급히 다녀간 뒤 다시 찾아온 적막 속에서, 그는 끓어오르는 좌절감과 함께 현재 상황을 수습할 적당한 방도를 찾을 수 없는 지독한 무기력을 느꼈을 것이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 끝에서 결국 황사영은 외세를 통한 ‘천지개벽’이라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어딘가 기시감이 드는 결말이다.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는 무력감에 시달리는 이들이 혹했던 해법과 그 끝에 도래할 이상세계. 더군다나 당시 조선에는 출처가 불분명한 예언서, ‘정감록(鄭鑑錄)’이 유행했다. 이씨(조선)가 망하고 정씨가 흥한다는 ‘정감록’의 종말론은 조선 후기 민란의 주동자들이 민심을 모으고 봉기를 합리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황사영이 백서에 쓴 ‘서양 함대’는 결국 정감록이 약속했던 ‘정진인(鄭眞人)’의 천주교식 변주였다.
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로 ‘기적에 대한 믿음’과 ‘시간에 대한 믿음’을 꼽았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외부의 기적(‘마법적 조력자’)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황사영이 꿈꾼 서양 함대는 스스로 현실을 바꿀 힘을 읽어버린 시대가 만들어 낸 슬픈 판타지인 셈이다.
하늘을 향해 팔 벌리고 있는 황사영 동상.
황사영이 능지처참형을 받고 200여년이 지난 뒤, 토굴 맞은편에 대성당과 소성당이 나란히 들어섰다. 이곳에 묻힌 조선의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 신부를 기리는 공간이다. 건축가 안영배와 박재환은 ‘배 밑바닥’을 뜻하는 ‘배론’이라는 지명에서 모티브를 얻어 배를 형상화한 성당을 설계했다. 내부로 들어서면 건물 안에 기둥을 두지 않기 위해 고안한 나무로 만든 지붕이 거대한 배의 늑골을 떠올리게 한다. 그 늑골 정중앙을 일직선으로 가르며 건물 안으로 들어오는 빛은 제단 뒤 십자고상을 향해 뻗어 있다.
천주교에서 큰 배는 죽음의 물길을 건너는 ‘구원의 방주’를 상징한다. 하지만 배를 닮은 두 성당이 내게는 ‘백서’에 적힌 서양의 함대처럼 보였다. 황사영이 자신과 조선 교회를 단번에 구해 줄 거라 믿었던 그 위태로운 환영 속의 서양 함대가 이 성당을 닮지 않았을까?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새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매일매일에 인위적인 매듭을 짓는 기준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또 다른 시작을 꿈꾼다. 새해에도 우리의 삶은 황사영이 원했던 서양 함대와 같은 격변보다는 평범할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내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한 방에 뒤집을 기적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내는 끈기와 용기 그리고 그 평범함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감탄과 나를 향한 온전한 집중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론의 성당(방주)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현실적이고 선명한 위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황사영은 나라에 큰 경사가 있을 때 실시하는 임시 과거 시험인 증광시(增廣試)에 16세의 나이로 최연소 합격했다. 심지어 정조가 친히 채점한 두 번째 시험에서도 장원을 차지했다. 정조는 어린 그의 손을 잡으며, 스무 살이 되면 벼슬길로 나와 자신을 도우라고 청했다. 이후 황사영은 야마토게임예시 정조가 잡은 손목에 붉은 명주를 감고 다녔고, 사람들은 감히 그의 손을 만지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정조와 다시 만난 황사영은 왕이 기대했던 청년이 아니었다.
건축가 안영배와 박재환은 ‘배의 밑바닥’이라는 뜻의 지명(배론)에 착안해 배를 닮은 두 성당을 설계했다. 성서에서 백경게임 배는 구원의 방주를 상징하지만 배론에 정박한 두 척의 성당은 신유박해를 천지개벽으로 해결하고 싶었던 젊은 황사영의 환영 속 서양 함대를 떠올리게 한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황사영을 바꿔놓은 건 ‘서학(西學)’이었다. 증광시에 합격하기 1년 전, 그는 당대 실학의 거두였던 체리마스터모바일 정약용의 맏형, 정약현의 사위가 되었다. 서학에 천천히 스며든 황사영은 임금이 성균관에 행차해도 맞으러 나가지 않을 정도로 서학에 심취해 있었다. 1795년에는 사제로서 조선에 최초로 입국한 주문모 신부를 만나면서 과거 시험을 완전히 포기하고 평신도로 이루어진 명도회(明道會) 활동에 전념하게 된다. 좋은 집안에 어릴 때부터 총명한 머리로 해박한 교리 지식을 황금성슬롯 갖추고 있던 젊은 황사영은 단숨에 조선 교회의 거두가 되었다.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국상이 끝나자 조선 정부의 분위기가 급변했다. 영조의 계비였던 정순왕후는 어린 순조를 대신해 수렴청정했는데, 이듬해부터 천주교인들을 발본색원했다. 신유박해의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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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사영이 8개월간 숨어지내며 백서를 썼던 토굴 외부 모습.
배론성지 대성당의 전경.
조선 정부의 추격을 피해 황사영은 배론리로 숨어들었다. 그곳에서 옹기 가게를 운영하는 김귀동이 그를 맞았다. 당시 배론리에는 교우촌이 형성돼 있었는데, 대부분의 교우촌이 그렇듯 이곳도 산골짜기 아주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김귀동은 토굴을 짓고 그곳에 황사영을 숨겼다. 하지만 황사영이 쓴 ‘백서(帛書)’를 북경교구에 전달하기로 한 황심이 잡히면서 그도 체포되었다. 스스로 빛 한 줄기 들지 않는 토굴로 숨어 들어간 지 8개월 만이었다.
움푹 들어간 세상의 끝에서 그는 ‘백서’를 썼다. 가로 62㎝, 세로 38㎝의 명주천에 깨알 같은 크기로 1만3384자를 꾹꾹 눌러 담았다. 백서에는 조선 교회의 소개와 순교자들의 일생, 신유박해의 전개 과정이 실려 있다. 그리고 북경교구장, 구베아(A. de Gouvea) 주교가 교황에게 조선 교회의 상황을 알리고 중국 황제로 하여금 조선을 감독하게 해 달라는 청원이 담겨 있다. 심지어 군대를 태운 수백 척의 서양 함대가 조선으로 와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도록 조선 정부를 압박해달라는 요청도 적혀 있다. 조선 정부 입장에서 황사영의 백서는 외환죄의 명백한 증거였다. 이후 천주교는 단순한 사학이 아닌 국가 전복을 꾀하는 역모 집단이 되었다.
전도유망했던 황사영이 입신양명의 탄탄대로를 걷어찬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도대체 무엇이 ‘백서’를 쓰고 스스로 대역죄인이 되게 했을까? 나는 그 이유가 그를 열병처럼 휘감았던 ‘신앙심’ 때문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이 질문이 올 한 해 내 머릿속을 계속 맴돌았고, 결국 가을의 문턱에서 충북 제천의 깊은 골짜기, 배론성지를 찾게 했다. 그가 숨죽여 지냈던 토굴 앞에 서서 청년 황사영의 마음을 헤아려 보려 했다.
그는 두 평 남짓한 토굴 속에서 조선 교회가 무너져 내리는 참혹한 소식을 접해야 했다. 소식통들이 황급히 다녀간 뒤 다시 찾아온 적막 속에서, 그는 끓어오르는 좌절감과 함께 현재 상황을 수습할 적당한 방도를 찾을 수 없는 지독한 무기력을 느꼈을 것이다. 현실을 바꿀 수 없다는 절망 끝에서 결국 황사영은 외세를 통한 ‘천지개벽’이라는 방안을 생각해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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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정신분석학자 에리히 프롬은 저서 ‘나는 왜 무기력을 되풀이하는가’에서 자신의 무기력을 회피하려는 사람들의 심리로 ‘기적에 대한 믿음’과 ‘시간에 대한 믿음’을 꼽았다. 자신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외부의 기적(‘마법적 조력자’)이 해결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황사영이 꿈꾼 서양 함대는 스스로 현실을 바꿀 힘을 읽어버린 시대가 만들어 낸 슬픈 판타지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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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주교에서 큰 배는 죽음의 물길을 건너는 ‘구원의 방주’를 상징한다. 하지만 배를 닮은 두 성당이 내게는 ‘백서’에 적힌 서양의 함대처럼 보였다. 황사영이 자신과 조선 교회를 단번에 구해 줄 거라 믿었던 그 위태로운 환영 속의 서양 함대가 이 성당을 닮지 않았을까?
이제 일주일만 지나면 새해다. 어제와 다를 바 없는 매일매일에 인위적인 매듭을 짓는 기준이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새로운 희망을 품고 또 다른 시작을 꿈꾼다. 새해에도 우리의 삶은 황사영이 원했던 서양 함대와 같은 격변보다는 평범할 확률이 높다. 그렇기에 내년에도 여전히 우리에게 필요한 건 현실로부터 도피하거나 한 방에 뒤집을 기적이 아니라 일상을 살아내는 끈기와 용기 그리고 그 평범함 속에서 발견하는 작은 감탄과 나를 향한 온전한 집중이다. 거친 파도 속에서도 침몰하지 않고 오늘을 살아내는 것. 그것이야말로 배론의 성당(방주)이 우리에게 건네는 가장 현실적이고 선명한 위로다.
방승환 도시건축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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