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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선강보한
등록일: 25-11-14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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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암 이병헌. 사진=수원시정연구원 수원학총서2(2019)
"1919년 1∼2월 서울에서 천도교 교조 손병희의 명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이승훈에게 전달해 기독교계의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하고, 동년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돕고 이를 비밀리에 천도교당으로 운반한 후 다시 전국 각지에 배부케 했으며,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당시 진행 상황의 기록을 담당하는 한편 탑동공원에 운집한 학생 시민들과의 연락을 맡아 활동하고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도 참가했으며 민족대표들의 피체 후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국가보훈부 공적 내용)
위의 인용문은 오암(梧 야마토게임장 菴) 이병헌(李炳憲)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이다. 오암 이병헌은 천도교인으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운반했을 뿐만 아니라 만세시위에 직접 참여했고,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민족운동가이다.
◇아버지 이민도, 3·1운동 때 예비검속 당해
이병헌은 릴게임가입머니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린 이듬해 1895년 11월 20일 아버지 이민도와 어머니 남원 양씨의 4대 독자로 경기도 진위군(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 44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 도호는 오암, 필명은 석운(石雲)이었다.
그가 태어난 권관리는 서해안을 끼고 있는 어촌마을이다. 서해안과 마주하는 마을 끝에는 닭 머리를 닮은 계두봉, 오션릴게임 마을 뒷편에는 옥녀봉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이 두 봉우리는 3·1운동 당시 평택지역에서 최초로 횃불을 올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진위군 현덕면이지만 생활권은 수원에 속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의 중심지는 안중이지만 수원으로 진출하는 것이 수도권과 더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이병헌의 야마토통기계 아버지 이민도는 원래 한학을 공부한 유학자였지만 28세 되던 해 동학에 입도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3월 22일 진위군 현덕면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예비검속을 당한 바 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동학의 영향을 받은 이병헌은 16세 때인 1911년 6월경 수원교구 제544 강습소에 입학해 근대적 학문과 종교적 소양을 바다이야기하는법 쌓았다.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 사진=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보성사 인쇄한 독립선언서 무사히 운반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손병희의 부름을 받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게 된 이병헌은 3·1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병헌은 1919년 2월 27일 밤 10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이를 가마니에 넣은 다음 그 위에 석탄을 담아 석탄 가마니로 위장했다. 그리고 신숙과 함께 이종일 보성사 사장의 집으로 운반했다. 당시의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월 27일 오후 10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박동 오모(博洞 吳謀) 씨 집에 운반하기로 했으나 오모는 돌연히 거절하므로 경운동 88번지에 신축 중인 천도교당 기지로 운반할 때 때마침 전기고장으로 전등이 꺼져 전 시가가 암흑세계로 화했다. 안국동, 재동 두 파출소 앞을 무사히 지나 목적지에 왔었다."(이병헌, '일지 중 독립선언서 배포',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 1959)
이병헌은 신숙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옮길 때 다행히 정전이 돼 무사히 이종일의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태화관과 탑골공원의 연락을 맡아
3월 1일 독립선언 당일 이병헌은 손병희를 따라 민족대표 33인이 모이기로 한 태화관 현장에 참석했다. 원래는 민족대표들이 이날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했으나, 불의의 사고를 사전 예방하기 위해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해 이병헌은 "태화관은 전일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 이완용이 거주한 집으로 을사늑약을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와 밀의하던 장소이며, 서기 1907년 7월 17일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도 이 장소에서 했고, 합방조약 준비도 이 집에서 모의했다"고 했다. 이병헌의 이러한 인식은 민족반역의 장소를 독립선언의 장소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이병헌은 학생 대표인 이규갑과 같이 탑골공원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33인 민족대표들이 피체된 이후에는 남대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어 3월 3일부터 5일까지 만세 시위대와 함께 서울 시내를 돌면서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이병헌은 종로경찰서로부터 검거령이 내려졌다. 이에 이병헌은 3월 15일을 전후해 자신이 활동하였던 수원지역으로 피신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5일자에 실린 태화관 옛 모습. 사진=동아일보
◇제암리학살사건 목격하고 기록
수원에 내려온 이병헌은 수원교구에서 3·1운동을 논의했고, 수원지역에서 3·1운동이 크게 확산됐다. 이병헌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수원에서도 만세운동과 이에 대한 비용을 부담할 것을 논의했다.
수원교구에서 이병헌이 중심이 돼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한 일제 측의 소방대와 일본인이 합세해 소방용 갈고리와 괭이 등으로 교구에 난입하는 한편 교인들을 마구 구타했다. 이로 인해 이병헌은 김정담, 김정모, 안종환, 안종린, 홍종각, 김상근 등과 함께 중경상을 입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이병헌에 대해 수원과 진위 경찰서에서 계속 추적하자, 수원교구에서 활동할 때 절친하게 지냈던 향남면 제암리 김학교의 집에서 숨어 지내면서 치료했다. 이병헌이 김학교의 집에 머무는 동안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이 시위에서 우정면사무소와 장안면사무소가 불타버렸고, 화수리주재소의 일본인 순사부장 가와바타(川端豊太郞)을 참살했다. 일제는 수비대를 동원, 제암리에서 주민을 학살하고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보복을 자행했다. 당시의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김학교 씨 댁에 숨어서 탈출을 준비하고 있던 중 4월 15일 정오에 발안장터 경찰관주재소에서 제암리에 와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에게 오후 1시를 위해 수원수비대가 타합할 말이 있으니 예배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당지 교인들이 필자를 보고 통역을 요구했으나 필자는 자신이 체포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이를 거절하고 안정옥 씨의 안내로 뒷산에 숨어서 그 동정을 감시했던 바, 예배당 정문 앞에 일병과 왜노 사사키(佐板才吉)가 섰는데 순한 양과 같은 교인들은 예배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 섰던 일병은 총 길이로 사람 키를 비교해서 안으로 들어가게 한 후 문을 닫아버리고 석유를 뿌리고 교회에서 방화를 하고 생화장을 하는 천인이 공로할 참극을 연출시켰다. 그 중에 홍순진 씨가 뛰어나오다가 총에 맞아서 넘어졌다."(이병헌, '수원사건', '신천지' 통권 2호, 서울신문사, 1946.3)
제암리에서 탈출한 이병헌은 마을 뒷산에서 '제암리학살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를 기록했는데, 이병헌이 '제암리학살사건'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은 1926년 '수원군종리원 연혁'이었다. '수원군종리원 연혁'에는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월 15일에 본구 관내 향남면 제암리 전교사 안종환 외 김흥렬, 김기훈, 김기영, 안경순, 김성렬, 홍순진, 안종린, 김세기, 안응순, 안상용, 안정옥, 안종형, 안종화, 김세열, 안자순, 안호순 제씨는 그곳 즉 야소교당에서 무고히 교의 혐의로 소살(燒殺)을 당하고 곳곳마다 심한 고초가 있었다."(이병헌, '수원군종리원 연혁', '천도교회월보')
독립선언서 운반, 태화관과 탑골공원의 상황 연락, 서울 만세시위 참가, 제암리학살사건 목격 등을 경험한 이병헌은 해방 후 3·1운동 50주년을 맞은 1959년 '3·1운동비사'를 남겼다. 이 책은 3·1운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신간회 경성지회에서의 활동
신간회 경성지회 설립대회 소식을 다룬 중외일보 1927년 6월 12자 신문. 사진=중앙일보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결성되고 지방에서는 지회가 설립됐다. 경성에서도 1927년 5월 25일 30여 명이 조선교육협회에 모여 신간회 경성북부지회 설치준비회를 개최했다. 경성북부지회 설치에 천도교(구파)에서도 적극 참여했는데, 이병헌은 오상준, 박완, 최준모, 김영륜, 박양신, 이황 등과 함께 참여했다.
준비과정에서 신간회본부가 경성에 지회를 하나만 둔다는 결정에 따라 경성북부지회는 6월 3일 경성지회 설치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이병헌은 준비위원으로 선임됐다. 이병헌 등 신간회 경성지회 준비위원들은 6월 10일 하오 8시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설립대회를 열고 경성지회를 설치했다. 이날 설립대회에서 이병헌은 간사로 선출됐다.
경성지회는 10월 29일 오후 1시 안국동 범어사 포교소에서 간사회를 개최했는데, 이병헌이 상무간사로 있는 총무부는 8월 11일부터 말일까지 회원 방문 및 회비 징수의 건, 회원 김동철 탈회의 건, 지회 규칙 수정의 건 등을 처리했다고 보고했고,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을 조사해 보고할 것을 일임했다. 이외에도 이병헌은 조직부, 교육부, 서무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병헌은 경성지회뿐만 아니라 신간회본부의 행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8년 7월에는 전국 각 지역에 대한 순회 강연을 시작했다. 지역별 순회 강연에서 이병헌은 이종린과 함께 함경도 지방을 담당했다. 이때 이병헌은 강연내용이 불순하다고 해 일시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병헌이 이처럼 3.1운동과 신간회 등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천도교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아버지 이민도가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인 보은의 척왜양창의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던 사실은 그로 하여금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동기로 판단된다.
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1919년 1∼2월 서울에서 천도교 교조 손병희의 명을 받아 독립운동 자금 5천 원을 이승훈에게 전달해 기독교계의 독립만세운동을 지원하고, 동년 2월 27일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를 돕고 이를 비밀리에 천도교당으로 운반한 후 다시 전국 각지에 배부케 했으며, 3월 1일 태화관에서 독립선언식 거행 당시 진행 상황의 기록을 담당하는 한편 탑동공원에 운집한 학생 시민들과의 연락을 맡아 활동하고 서울 시내에서 벌어진 만세시위에도 참가했으며 민족대표들의 피체 후 가족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는 등의 사실이 확인됨"(국가보훈부 공적 내용)
위의 인용문은 오암(梧 야마토게임장 菴) 이병헌(李炳憲)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이다. 오암 이병헌은 천도교인으로 3·1운동 당시 독립선언서를 운반했을 뿐만 아니라 만세시위에 직접 참여했고, 신간회운동에 참여한 민족운동가이다.
◇아버지 이민도, 3·1운동 때 예비검속 당해
이병헌은 릴게임가입머니 동학농민혁명이 막을 내린 이듬해 1895년 11월 20일 아버지 이민도와 어머니 남원 양씨의 4대 독자로 경기도 진위군(현 평택시) 현덕면 권관리 445번지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함평, 도호는 오암, 필명은 석운(石雲)이었다.
그가 태어난 권관리는 서해안을 끼고 있는 어촌마을이다. 서해안과 마주하는 마을 끝에는 닭 머리를 닮은 계두봉, 오션릴게임 마을 뒷편에는 옥녀봉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이 두 봉우리는 3·1운동 당시 평택지역에서 최초로 횃불을 올리고 만세운동을 전개한 곳이기도 하다. 그가 태어난 곳은 진위군 현덕면이지만 생활권은 수원에 속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의 중심지는 안중이지만 수원으로 진출하는 것이 수도권과 더 가까운 곳이기도 하다.
이병헌의 야마토통기계 아버지 이민도는 원래 한학을 공부한 유학자였지만 28세 되던 해 동학에 입도했다. 그는 1919년 3·1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될 때 3월 22일 진위군 현덕면에서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예비검속을 당한 바 있다. 어릴 적부터 아버지로부터 동학의 영향을 받은 이병헌은 16세 때인 1911년 6월경 수원교구 제544 강습소에 입학해 근대적 학문과 종교적 소양을 바다이야기하는법 쌓았다.
이병헌의 '삼일운동비사'. 사진=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보성사 인쇄한 독립선언서 무사히 운반
3·1운동이 일어나기 직전 손병희의 부름을 받고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하게 된 이병헌은 3·1운동에 직간접으로 참여하게 된다. 이병헌은 1919년 2월 27일 밤 10시 보성사에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이를 가마니에 넣은 다음 그 위에 석탄을 담아 석탄 가마니로 위장했다. 그리고 신숙과 함께 이종일 보성사 사장의 집으로 운반했다. 당시의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2월 27일 오후 10시 독립선언서의 인쇄가 끝나자 박동 오모(博洞 吳謀) 씨 집에 운반하기로 했으나 오모는 돌연히 거절하므로 경운동 88번지에 신축 중인 천도교당 기지로 운반할 때 때마침 전기고장으로 전등이 꺼져 전 시가가 암흑세계로 화했다. 안국동, 재동 두 파출소 앞을 무사히 지나 목적지에 왔었다."(이병헌, '일지 중 독립선언서 배포', '3.1운동비사', 시사시보사, 1959)
이병헌은 신숙과 함께 독립선언서를 옮길 때 다행히 정전이 돼 무사히 이종일의 집으로 옮길 수 있었다.
◇태화관과 탑골공원의 연락을 맡아
3월 1일 독립선언 당일 이병헌은 손병희를 따라 민족대표 33인이 모이기로 한 태화관 현장에 참석했다. 원래는 민족대표들이 이날 오후 2시 탑골공원에서 독립선언식을 갖기로 했으나, 불의의 사고를 사전 예방하기 위해 장소를 태화관으로 옮긴 것이다.
이에 대해 이병헌은 "태화관은 전일 민족반역자(民族反逆者) 이완용이 거주한 집으로 을사늑약을 일본인 이토 히로부미와 밀의하던 장소이며, 서기 1907년 7월 17일 고종 황제가 퇴위하고 황태자 순종을 즉위케 한 음모도 이 장소에서 했고, 합방조약 준비도 이 집에서 모의했다"고 했다. 이병헌의 이러한 인식은 민족반역의 장소를 독립선언의 장소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던 생각을 반영한 것으로 풀이된다.
이날 이병헌은 학생 대표인 이규갑과 같이 탑골공원과의 연락책으로 활동했다. 33인 민족대표들이 피체된 이후에는 남대문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기도 했다. 이어 3월 3일부터 5일까지 만세 시위대와 함께 서울 시내를 돌면서 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인해 이병헌은 종로경찰서로부터 검거령이 내려졌다. 이에 이병헌은 3월 15일을 전후해 자신이 활동하였던 수원지역으로 피신했다.
동아일보 1924년 7월 5일자에 실린 태화관 옛 모습. 사진=동아일보
◇제암리학살사건 목격하고 기록
수원에 내려온 이병헌은 수원교구에서 3·1운동을 논의했고, 수원지역에서 3·1운동이 크게 확산됐다. 이병헌은 서울에서의 만세운동 상황을 설명하고 수원에서도 만세운동과 이에 대한 비용을 부담할 것을 논의했다.
수원교구에서 이병헌이 중심이 돼 만세시위를 준비한다는 소식을 정탐한 일제 측의 소방대와 일본인이 합세해 소방용 갈고리와 괭이 등으로 교구에 난입하는 한편 교인들을 마구 구타했다. 이로 인해 이병헌은 김정담, 김정모, 안종환, 안종린, 홍종각, 김상근 등과 함께 중경상을 입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도 이병헌에 대해 수원과 진위 경찰서에서 계속 추적하자, 수원교구에서 활동할 때 절친하게 지냈던 향남면 제암리 김학교의 집에서 숨어 지내면서 치료했다. 이병헌이 김학교의 집에 머무는 동안 우정면과 장안면에서 만세시위가 전개됐다. 이 시위에서 우정면사무소와 장안면사무소가 불타버렸고, 화수리주재소의 일본인 순사부장 가와바타(川端豊太郞)을 참살했다. 일제는 수비대를 동원, 제암리에서 주민을 학살하고 우정면과 장안면 일대 집에 불을 지르는 등 보복을 자행했다. 당시의 상황을 이병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김학교 씨 댁에 숨어서 탈출을 준비하고 있던 중 4월 15일 정오에 발안장터 경찰관주재소에서 제암리에 와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에게 오후 1시를 위해 수원수비대가 타합할 말이 있으니 예배당으로 모이라고 했다. 당지 교인들이 필자를 보고 통역을 요구했으나 필자는 자신이 체포될 염려가 있었으므로 이를 거절하고 안정옥 씨의 안내로 뒷산에 숨어서 그 동정을 감시했던 바, 예배당 정문 앞에 일병과 왜노 사사키(佐板才吉)가 섰는데 순한 양과 같은 교인들은 예배당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문 앞에 섰던 일병은 총 길이로 사람 키를 비교해서 안으로 들어가게 한 후 문을 닫아버리고 석유를 뿌리고 교회에서 방화를 하고 생화장을 하는 천인이 공로할 참극을 연출시켰다. 그 중에 홍순진 씨가 뛰어나오다가 총에 맞아서 넘어졌다."(이병헌, '수원사건', '신천지' 통권 2호, 서울신문사, 1946.3)
제암리에서 탈출한 이병헌은 마을 뒷산에서 '제암리학살사건'을 목격했다. 그리고 이를 기록했는데, 이병헌이 '제암리학살사건'을 처음으로 기록한 것은 1926년 '수원군종리원 연혁'이었다. '수원군종리원 연혁'에는 제암리학살사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4월 15일에 본구 관내 향남면 제암리 전교사 안종환 외 김흥렬, 김기훈, 김기영, 안경순, 김성렬, 홍순진, 안종린, 김세기, 안응순, 안상용, 안정옥, 안종형, 안종화, 김세열, 안자순, 안호순 제씨는 그곳 즉 야소교당에서 무고히 교의 혐의로 소살(燒殺)을 당하고 곳곳마다 심한 고초가 있었다."(이병헌, '수원군종리원 연혁', '천도교회월보')
독립선언서 운반, 태화관과 탑골공원의 상황 연락, 서울 만세시위 참가, 제암리학살사건 목격 등을 경험한 이병헌은 해방 후 3·1운동 50주년을 맞은 1959년 '3·1운동비사'를 남겼다. 이 책은 3·1운동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사료로 활용되고 있다.
◇신간회 경성지회에서의 활동
신간회 경성지회 설립대회 소식을 다룬 중외일보 1927년 6월 12자 신문. 사진=중앙일보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결성되고 지방에서는 지회가 설립됐다. 경성에서도 1927년 5월 25일 30여 명이 조선교육협회에 모여 신간회 경성북부지회 설치준비회를 개최했다. 경성북부지회 설치에 천도교(구파)에서도 적극 참여했는데, 이병헌은 오상준, 박완, 최준모, 김영륜, 박양신, 이황 등과 함께 참여했다.
준비과정에서 신간회본부가 경성에 지회를 하나만 둔다는 결정에 따라 경성북부지회는 6월 3일 경성지회 설치위원회로 명칭을 변경했으며, 이병헌은 준비위원으로 선임됐다. 이병헌 등 신간회 경성지회 준비위원들은 6월 10일 하오 8시 종로 중앙기독교청년회관에서 설립대회를 열고 경성지회를 설치했다. 이날 설립대회에서 이병헌은 간사로 선출됐다.
경성지회는 10월 29일 오후 1시 안국동 범어사 포교소에서 간사회를 개최했는데, 이병헌이 상무간사로 있는 총무부는 8월 11일부터 말일까지 회원 방문 및 회비 징수의 건, 회원 김동철 탈회의 건, 지회 규칙 수정의 건 등을 처리했다고 보고했고, 중앙고등보통학교의 동맹휴학을 조사해 보고할 것을 일임했다. 이외에도 이병헌은 조직부, 교육부, 서무부 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이병헌은 경성지회뿐만 아니라 신간회본부의 행사에도 적극 참여했다. 1928년 7월에는 전국 각 지역에 대한 순회 강연을 시작했다. 지역별 순회 강연에서 이병헌은 이종린과 함께 함경도 지방을 담당했다. 이때 이병헌은 강연내용이 불순하다고 해 일시적으로 구속되기도 했다.
이병헌이 이처럼 3.1운동과 신간회 등 민족운동에 적극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천도교의 민족주의적 성향도 있었겠지만, 아버지로부터 받은 영향도 적지 않았을 것으로 본다.
아버지 이민도가 사회개혁운동의 일환인 보은의 척왜양창의운동과 동학농민혁명에 참가했던 사실은 그로 하여금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던 동기로 판단된다.
성주현 평택박물관연구소 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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