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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채현채
등록일: 25-10-24 12:12
이탈리아의 옛 2000리라 지폐에 그려진 갈릴레오. 게티이미지 뱅크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당대에 성능이 가장 뛰어난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 덕분에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들이 쏟아졌다. 달의 표면은 철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전혀 매끈하지 않았고, 우주에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별이 있었다. 목성의 위성 4개도 이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신 발견들은 당시 주류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을 논박하고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에 더욱 힘을 실었다. 이듬해 갈릴레오는 자신의 성과를 ‘별의 전령(시데레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갈릴레오의 감각은 우주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반짝바다이야기 황금고래
였다. 그는 새로 발견한 ‘4개의 행성’(실제로는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의 별들’로 명명하고, 새 저서 ‘별의 전령’을 이제 막 토스카나 대공국 군주로 즉위한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에 헌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비를 들여 저서 사본을 배포하고 그 출처가 메디치 가문인 것처럼 꾸몄다. 앞서 1605년 갈릴레오는 중개인들을 통해 메디치가에 접근하고 어린 성장가치주
왕세자 코시모 2세에게 다용도 측정 도구인 컴퍼스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런 헌정은 갈릴레오의 앞길을 완전히 바꿔놨다. 코시모 2세는 당시 이탈리아 동북부 지역의 파도바대학 수학 교수로 있던 갈릴레오를 피렌체의 궁정으로 불러들이고 특별한 지위를 선물했다. ‘대공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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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인 갈릴레오 l 마리오 비아졸리 지음, 박초월 옮김, 소요서가, 3만8000원
이탈리아 출신 미국 학자 마리오 비아졸리의 ‘궁정인 갈릴레오’는 “갈릴레오가 새로운 철학자 혹은 새로운 천문학자라는 사회 직업적 정체성을 궁정에 기반해 확립해 간 과정을 추적하고, 그 관심주식
정체성과 과학 연구 간의 관계를 분석”한 과학사의 고전이다. ‘절대주의 문화에서의 과학적 실천’이란 부제(원저와 번역서가 같다)가 책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준다. 과학의 역사가 권력-후원-명성이라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꼼꼼한 1차 사료들과 갈릴레오의 생애를 토대로 세밀하게 재구성했다.
갈릴레오는 토스카나의 지방 도시 피PROTV
사 출신이다. 아버지의 강권으로 의대에 진학했으나 흥미를 잃고 피사를 떠났다. 메디치 가문이 후원하던 피렌체의 아카데미에서 수학·건축·역학·시각예술이 교차하는 응용수학을 배우며 청년기를 보냈다. 이후 갈릴레오는 메디치가의 방대한 네트워크를 활용해 권력의 중심에 접근하려 애썼다. 권력자의 권위가 보장하는 학문적 정당화와 후원을 갈망해서다.
16~17세기 유럽의 학문 세계는 엄격한 위계로 구성됐다. 자연철학자들은 우주의 본질과 천체운동의 원리를 해석할 권한을 독점했다. 반면 수학은 철학과 신학에 종속된 기술 분과에 속했고, 자연 현상의 물리적 차원을 다룰 자격이 없었다. 수학자들은 천체 운동을 계산하고 예측하는 기능인에 불과했다.
갈릴레오(오른쪽 두 번째)가 베니스의 군주에게 망원경을 사용하는 방법을 가르쳐주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그림. 위키미디어 코먼스
수학자로 출발한 갈릴레오가 자신의 우주론을 정당화하려면 관측 증거를 제시하는 것만으로는 불충분했다. 철학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사회적 지위가 필요했다. 갈릴레오가 독보적인 천문학적 발견을 메디치가에 헌정한 것은 학문적 주장을 정당화하기 위한 정치적 선물이자 거래였다. ‘대공의 철학자 겸 수학자’라는 전례 없는 지위는 갈릴레오에게 과학자로서 명예와 후원을 보장했고, 갈릴레오의 ‘메디치의 별’ 헌정은 군주의 가문에 하늘의 질서와 연결된 상징적 권위를 부여했다. 진리는 그 자체로 증명되고 인정받는 게 아니라 사회적·제도적 승인의 결과였던 셈이다.
지은이는 갈릴레오를 “부여받은 역할과 기대에 자신을 끼워 맞춰 정당화를 이루려 했던 ‘시스템의 노예’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그보다는 “갈릴레오가 주변 환경에서 인지한 밑천들을 활용해 새로운 사회 직업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새로운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궁정에서 자신의 자연철학을 옹호하는 청중을 확보”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갈릴레오는 궁정인 지위를 얻고서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토론할 수 있었다. 1611년 피사 대학의 철학자들과 차가움의 본질을 놓고 벌인 ‘부양성 논쟁’이 시작이었다. 갈릴레오는 얼음이 물에 뜬다는 사실에 착안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얼음이 응축된 물이 아니라 희박해진 물이라고 논박했다. 단위 부피당 무게를 가리키는 ‘고유 무게’(비중)의 수학적 개념이 근거였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어떤 물체가 특정 매질에서 뜨거나 가라앉는 것은 그 물체의 형상과 본성으로 결정된다고 봤는데, 갈릴레오는 부양은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 조건의 문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갈릴레오 조각상. 게티이미지뱅크
갈릴레오와 예수회 성직자들 사이의 혜성 논쟁도 흥미롭다. 1618년 후반 유럽 하늘에 3개의 혜성이 잇달아 나타났다. 혜성은 프톨레마이오스나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 저술에서 다루지 않았던데다, 당시만 해도 혜성은 천문 현상이 아니라 자연의 변동 내지 불길한 징조로 여겼던 참이다.
예수회는 당시 공식 과학 교육의 중심인 로마대학(콜레지오 로마노)에서 정통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기반해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들은 관측을 토대로 혜성의 위치는 달보다 높은 천상계라고 주장했다. 이는 천구의 바깥에선 어떤 변화나 생성·소멸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과는 배치됐다. 예수회 학자들은 “혜성들이 끔찍한 징조가 아니라 고결하고 격조 높은 대화 주제”라는 식으로 논점을 살짝 비껴갔다.
마침 병상에 누워 혜성을 보지도 못한 갈릴레오는 예수회가 관측한 것은 천체 실물이 아니라 대기 현상의 광학적 착시라는 도발적 반론을 폈다. 갈릴레오의 가설은 증거 부족에 따른 억측이었지만, 이 논쟁은 누가 옳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신뢰받는 지식 생산자냐 하는 명성과 권위 경쟁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예수회도 궁정 시장에 천문학 연구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로마 대학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1633년 갈릴레오의 종교 재판도 단순히 ‘과학 대 교회’의 대결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맥락 위에 재배치한다. “매우 강한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갈릴레오는 9년 뒤 사망 때까지 피렌체의 집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의 우주론도 함께 유폐됐다. 갈릴레오에 대한 단죄는 신·구교 갈등 격화에 따른 바티칸의 신학적 권위주의, 교황청과 메디치가의 관계, 명성 관리의 실패 등이 겹친 복합적 사건이었다.
옮긴이 박초월은 “비아졸리가 오랜 투병 끝에 올해 5월22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며 “번역을 좀 더 빨리 끝내 그가 한국어판을 받아볼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1609년 갈릴레오 갈릴레이(1564~1642)는 당대에 성능이 가장 뛰어난 망원경을 제작했다. 그 덕분에 새로운 천문학적 발견들이 쏟아졌다. 달의 표면은 철학자들의 주장과 달리 전혀 매끈하지 않았고, 우주에는 알려진 것보다 훨씬 많은 별이 있었다. 목성의 위성 4개도 이때 처음 모습을 드러냈다. 눈부신 발견들은 당시 주류였던 아리스토텔레스 우주론을 논박하고 코페르니쿠스 우주론에 더욱 힘을 실었다. 이듬해 갈릴레오는 자신의 성과를 ‘별의 전령(시데레우스 눈치우스, Sidereus Nuncius)’라는 책으로 출간했다.
갈릴레오의 감각은 우주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반짝바다이야기 황금고래
였다. 그는 새로 발견한 ‘4개의 행성’(실제로는 목성의 위성)을 ‘메디치의 별들’로 명명하고, 새 저서 ‘별의 전령’을 이제 막 토스카나 대공국 군주로 즉위한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2세에 헌정했다. 그뿐만 아니라 사비를 들여 저서 사본을 배포하고 그 출처가 메디치 가문인 것처럼 꾸몄다. 앞서 1605년 갈릴레오는 중개인들을 통해 메디치가에 접근하고 어린 성장가치주
왕세자 코시모 2세에게 다용도 측정 도구인 컴퍼스를 선물하기도 했다.
이런 헌정은 갈릴레오의 앞길을 완전히 바꿔놨다. 코시모 2세는 당시 이탈리아 동북부 지역의 파도바대학 수학 교수로 있던 갈릴레오를 피렌체의 궁정으로 불러들이고 특별한 지위를 선물했다. ‘대공의 수학자이자 철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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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정인 갈릴레오 l 마리오 비아졸리 지음, 박초월 옮김, 소요서가, 3만8000원
이탈리아 출신 미국 학자 마리오 비아졸리의 ‘궁정인 갈릴레오’는 “갈릴레오가 새로운 철학자 혹은 새로운 천문학자라는 사회 직업적 정체성을 궁정에 기반해 확립해 간 과정을 추적하고, 그 관심주식
정체성과 과학 연구 간의 관계를 분석”한 과학사의 고전이다. ‘절대주의 문화에서의 과학적 실천’이란 부제(원저와 번역서가 같다)가 책의 성격을 압축해 보여준다. 과학의 역사가 권력-후원-명성이라는 복잡한 관계망 속에서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꼼꼼한 1차 사료들과 갈릴레오의 생애를 토대로 세밀하게 재구성했다.
갈릴레오는 토스카나의 지방 도시 피PROT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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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는 갈릴레오를 “부여받은 역할과 기대에 자신을 끼워 맞춰 정당화를 이루려 했던 ‘시스템의 노예’가 아니”었다고 강조한다. 그보다는 “갈릴레오가 주변 환경에서 인지한 밑천들을 활용해 새로운 사회 직업적 정체성을 구축하고, 새로운 자연철학을 제안하며, 궁정에서 자신의 자연철학을 옹호하는 청중을 확보”하는 방식에 주목했다.
갈릴레오는 궁정인 지위를 얻고서야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과 대등한 지위에서 토론할 수 있었다. 1611년 피사 대학의 철학자들과 차가움의 본질을 놓고 벌인 ‘부양성 논쟁’이 시작이었다. 갈릴레오는 얼음이 물에 뜬다는 사실에 착안해,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처럼 얼음이 응축된 물이 아니라 희박해진 물이라고 논박했다. 단위 부피당 무게를 가리키는 ‘고유 무게’(비중)의 수학적 개념이 근거였다. 아리스토텔레스학파는 어떤 물체가 특정 매질에서 뜨거나 가라앉는 것은 그 물체의 형상과 본성으로 결정된다고 봤는데, 갈릴레오는 부양은 본성의 문제가 아니라 물리적 조건의 문제라고 주장한 것이다.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있는 갈릴레오 조각상. 게티이미지뱅크
갈릴레오와 예수회 성직자들 사이의 혜성 논쟁도 흥미롭다. 1618년 후반 유럽 하늘에 3개의 혜성이 잇달아 나타났다. 혜성은 프톨레마이오스나 코페르니쿠스가 천문학 저술에서 다루지 않았던데다, 당시만 해도 혜성은 천문 현상이 아니라 자연의 변동 내지 불길한 징조로 여겼던 참이다.
예수회는 당시 공식 과학 교육의 중심인 로마대학(콜레지오 로마노)에서 정통 아리스토텔레스 자연철학에 기반해 천문학을 가르쳤다. 그들은 관측을 토대로 혜성의 위치는 달보다 높은 천상계라고 주장했다. 이는 천구의 바깥에선 어떤 변화나 생성·소멸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우주관과는 배치됐다. 예수회 학자들은 “혜성들이 끔찍한 징조가 아니라 고결하고 격조 높은 대화 주제”라는 식으로 논점을 살짝 비껴갔다.
마침 병상에 누워 혜성을 보지도 못한 갈릴레오는 예수회가 관측한 것은 천체 실물이 아니라 대기 현상의 광학적 착시라는 도발적 반론을 폈다. 갈릴레오의 가설은 증거 부족에 따른 억측이었지만, 이 논쟁은 누가 옳았느냐가 아니라 누가 더 신뢰받는 지식 생산자냐 하는 명성과 권위 경쟁의 단면을 잘 보여준다. 예수회도 궁정 시장에 천문학 연구 상품을 내놓기 시작했는데, 로마 대학도 메디치 가문의 후원을 받았기 때문이다.
지은이는 1633년 갈릴레오의 종교 재판도 단순히 ‘과학 대 교회’의 대결이 아니라 사회 문화적 맥락 위에 재배치한다. “매우 강한 이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은 갈릴레오는 9년 뒤 사망 때까지 피렌체의 집에서 가택연금 상태로 지냈다. 그의 우주론도 함께 유폐됐다. 갈릴레오에 대한 단죄는 신·구교 갈등 격화에 따른 바티칸의 신학적 권위주의, 교황청과 메디치가의 관계, 명성 관리의 실패 등이 겹친 복합적 사건이었다.
옮긴이 박초월은 “비아졸리가 오랜 투병 끝에 올해 5월22일 향년 69세로 세상을 떠났다”며 “번역을 좀 더 빨리 끝내 그가 한국어판을 받아볼 수 있었더라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했다.
조일준 선임기자 ilju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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