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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시채현채
등록일: 26-04-01 10:22
단발령에 품은 항일의지… 원주의병,강원봉기 기폭제였다
원주 을미의병(1896년 1월 12일)은 같은 시기 발생한 춘천과 강릉의 을미의병보다 더 앞서 봉기한 강원도내 최초의 을미의병이다. 원주 을미의병 세력은 해외로의 망명을 고민하던 의암 유인석 선생에게 다시금 항일의병에 나설 동기를 제공, 이후 전개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에 큰 영향을 줬다. 이에 본지는 원주지역 의병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왕현종 연세대 미래캠퍼스 교수와 심철기 한남대 교수를 만나 저평가된 원주 을미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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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주 안창고개에 조성된 을미의병 봉기 기념탑. 2. 원주 을미의병을 주도한 경기도 양평군 출신의 이춘영. 2026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3.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에 위치한 안승우의 묘. 4.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 위치한 김백선 사이다릴게임 의 묘. 정민엽 기자·국가보훈부·독립기념관 제공
■이춘영을 중심으로 거의한 원주 을미의병
이춘영(李春永·1868∼1896)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의 의병장이다. 특히 그의 가문은 원주를 비 바다신2게임 롯해 양평·여주·제천 지역에 걸쳐 넓은 인척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춘영의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참판 민치문(閔致文)의 딸이기도 했다.
이춘영은 1895년 발생한 을미사변과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항일의 뜻을 품게 됐다. 이에 고향인 지평을 방문, 포군 대장 김백선(金伯善)을 소개받았다. 김백선이 군사를, 이춘영이 재물을 책임지기로 릴게임5만 했다. 이 과정에서 안승우(安承禹)도 이춘영의 의병에 가담했다.
마침내 이들은 1896년 1월 12일 안창리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사람인 김사정(金思鼎)을 총독소모장에, 박운서(朴雲瑞)를 도령장으로 삼았다. 이때 모인 의병은 1000여 명에 달했다. 의병은 곧장 진격해 원주관아를 점령했고, 이어 1월 17일에는 제천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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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의병부대는 1월 22일 단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던 중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에 합류, 중군장을 맡아 전투를 지휘했다. 이춘영은 전투를 이어가며 호좌의진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던 중 1896년 2월, 충주 수안보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그는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전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희생과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올해는 그가 순국한 지 130주년 되는 해다.
왕현종 연세대 미래캠퍼스 교수가 원주 을미의병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백선과 안승우
이춘영이 주도한 원주 을미의병에는 김백선과 안승우가 함께했다. 김백선(金伯善·1873~1896)은 같은 지역 출신인 맹영재와 함께 동학농민군을 제압한 공으로 조정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이 때문에 맹영재는 지평의 군수가 됐고, 김백선은 절충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후 김백선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의 뜻을 품고 지평군수로 있던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맹영재는 김백선의 제안을 거절, 이에 지평 동향인 이춘영과 안승우를 만나 의병을 일으켰다.
안승우(安承禹·1865~1896)는 지평의 덕망 있는 유학자 안종응(安鍾應)의 아들로, 화서학파인 의암 유인석 등을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을 익혔다. 안승우는 갑오변란 후에 의병봉기를 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 을미년에 이춘영과 김백선 등이 의거를 준비하는 것을 알고 합류했다.
이후 김백선과 안승우는 의병으로서 함께 행동을 이어갔으나 이들의 끝은 좋지 못했다.
김백선은 단양, 제천, 충주성 싸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기세를 몰아 김백선은 충주성을 점령한 후 가흥전투에 참여했다. 이때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병력 지원요청을 했으나 선봉 종사 민의식의 농간으로 미처 원군을 보내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항거, 결국 군율로 세상을 떠났다.
김백선이 죽자 의병 활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관군과 일본군은 기세를 몰아 제천성 공략에 나섰다. 안승우는 직접 화약을 넣으며 전투를 독려했으나 갑자기 내린 비로 의병들의 화승총이 물에 젖어 쓸 수 없었다. 결국 안승우는 적의 탄환에 맞아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백선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안승우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심철기 한밭대 교수가 원주 안창리에 위치한 을미의병 봉기 기념탑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정민엽 기자
■왜 원창이었을까
원주 을미의병이 원창에서 거의한 배경에는 학연·혈연·지연이 모두 얽혀 있다. 의병 관련 연구와 강연을 이어오고 있는 심철기 한밭대 교수는 “구한말까지만 해도 안창은 나루터가 있고, 시장이 있고, 원주관아까지 가는 세금을 모아두는 창고도 있었다. 교통의 측면에서도 서울에서 임명된 강원관찰사가 원주까지 내려가는 길이 있던 곳”이라며 원창이 당시 중심지였음을 강조했다.
이어 심 교수는 “또한 원주 을미의병을 주도한 이춘영의 처가가 안창에 있었다. 그의 처가는 연안 김씨 가문으로, 당시 영향력이 상당했다”면서 “양평 지역 세력과 원주 세력이 만나 거의하기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 원창이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원주 을미의병이 원창에서 거의한 배경에는 당시 지평군수였던 맹영재의 완강한 반대가 존재한다. 당초 김백선과 인연이 있던 맹영재는 김백선이 함께 의병활동에 나설 것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맹영재는 개화파의 어윤중과 친하게 지내던 터라 의병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결국 반대에 부딪힌 이들은 장소를 옮겨 이춘영의 장인인 김응수가 군비를 마련 중이던 안창을 근거지로 삼았다.
■관점 바꿔 원주 을미의병 재조명해야
원주 을미의병은 초기 강원의병의 중심을 이루는 세 축(춘천·원주·강릉) 중 하나임에도 현재 원주 지역 내에서의 선양사업이나 연구는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연세대 미래캠퍼스에서 25년 넘게 후학 양성에 힘써 온 왕현종 교수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10여 년 동안은 원주지역 의병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활발했다”면서 “원주 을미의병은 규모와 시기면에서 같은 시기 발생한 춘천의병보다 앞섰다. 요동지역으로의 망명을 고민 중이던 의암 유인석이 생각을 바꿔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이어가게 된 배경에도 원주지역 의병이 있다”면서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왕 교수는 전국적으로도 원주 을미의병의 가치가 저평가 된 데 대해 “제천의병이 있기 전 주요 부대는 원주의병이었고, 이러한 흐름 의암 유인석의 투쟁을 이끌어 냈다. 이후로도 1905년, 1907년에도 차례대로 의병이 발생했다. 결국 원주권 의병은 13군 창의군의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원주 을미병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왕현종 교수는 ‘호서의병’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용어를 바꿀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의병항쟁의 공을 뺏으려는 뜻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는 학계에서 ‘제천의병’이나 ‘호서의진’ 등의 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는 결국 의병의 활동지를 충청 지역으로 제한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의병들의 활동지는 제천과 충주 뿐만 아니라 원주도 포함됐다. 충청도에 국한된 의병이 아니기에 명칭에 문제가 있다. 포괄적인 측면에서 용어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민엽 기자 jmy4096@kado.net
#김백선 #이춘영 #안승우 #맹영재 #창의군
원주 을미의병(1896년 1월 12일)은 같은 시기 발생한 춘천과 강릉의 을미의병보다 더 앞서 봉기한 강원도내 최초의 을미의병이다. 원주 을미의병 세력은 해외로의 망명을 고민하던 의암 유인석 선생에게 다시금 항일의병에 나설 동기를 제공, 이후 전개된 을사의병과 정미의병에 큰 영향을 줬다. 이에 본지는 원주지역 의병역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해 온 왕현종 연세대 미래캠퍼스 교수와 심철기 한남대 교수를 만나 저평가된 원주 을미의병의 역사적 가치를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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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원주 안창고개에 조성된 을미의병 봉기 기념탑. 2. 원주 을미의병을 주도한 경기도 양평군 출신의 이춘영. 2026년 1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3. 경기도 양평군 양동면 석곡리에 위치한 안승우의 묘. 4.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 위치한 김백선 사이다릴게임 의 묘. 정민엽 기자·국가보훈부·독립기념관 제공
■이춘영을 중심으로 거의한 원주 을미의병
이춘영(李春永·1868∼1896)은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출신의 의병장이다. 특히 그의 가문은 원주를 비 바다신2게임 롯해 양평·여주·제천 지역에 걸쳐 넓은 인척 관계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춘영의 어머니는 여흥 민씨로 참판 민치문(閔致文)의 딸이기도 했다.
이춘영은 1895년 발생한 을미사변과 이어 단발령이 내려지자 항일의 뜻을 품게 됐다. 이에 고향인 지평을 방문, 포군 대장 김백선(金伯善)을 소개받았다. 김백선이 군사를, 이춘영이 재물을 책임지기로 릴게임5만 했다. 이 과정에서 안승우(安承禹)도 이춘영의 의병에 가담했다.
마침내 이들은 1896년 1월 12일 안창리에서 의병부대를 결성하고, 원주사람인 김사정(金思鼎)을 총독소모장에, 박운서(朴雲瑞)를 도령장으로 삼았다. 이때 모인 의병은 1000여 명에 달했다. 의병은 곧장 진격해 원주관아를 점령했고, 이어 1월 17일에는 제천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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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로도 의병부대는 1월 22일 단양전투에서 승리를 거두는 등 뛰어난 활약을 펼치던 중 유인석이 이끄는 호좌의진에 합류, 중군장을 맡아 전투를 지휘했다. 이춘영은 전투를 이어가며 호좌의진의 핵심 인물로 활약하던 중 1896년 2월, 충주 수안보 전투에 참여했다. 이 전투에서 치열한 교전을 벌이던 그는 일본군의 유탄에 맞아 전장에서 순국하고 말았다.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희생과 공훈을 기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올해는 그가 순국한 지 130주년 되는 해다.
왕현종 연세대 미래캠퍼스 교수가 원주 을미의병의 역사적 가치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김백선과 안승우
이춘영이 주도한 원주 을미의병에는 김백선과 안승우가 함께했다. 김백선(金伯善·1873~1896)은 같은 지역 출신인 맹영재와 함께 동학농민군을 제압한 공으로 조정에까지 이름을 알렸다. 이 때문에 맹영재는 지평의 군수가 됐고, 김백선은 절충장군이라는 칭호를 얻었다.
이후 김백선은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항일의 뜻을 품고 지평군수로 있던 맹영재를 찾아가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제안했다. 그러나 맹영재는 김백선의 제안을 거절, 이에 지평 동향인 이춘영과 안승우를 만나 의병을 일으켰다.
안승우(安承禹·1865~1896)는 지평의 덕망 있는 유학자 안종응(安鍾應)의 아들로, 화서학파인 의암 유인석 등을 스승으로 모시며 학문을 익혔다. 안승우는 갑오변란 후에 의병봉기를 하려 했으나 주위의 만류로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이후 을미년에 이춘영과 김백선 등이 의거를 준비하는 것을 알고 합류했다.
이후 김백선과 안승우는 의병으로서 함께 행동을 이어갔으나 이들의 끝은 좋지 못했다.
김백선은 단양, 제천, 충주성 싸움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기세를 몰아 김백선은 충주성을 점령한 후 가흥전투에 참여했다. 이때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병력 지원요청을 했으나 선봉 종사 민의식의 농간으로 미처 원군을 보내지 못했다. 이 사건으로 김백선은 안승우에게 항거, 결국 군율로 세상을 떠났다.
김백선이 죽자 의병 활동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관군과 일본군은 기세를 몰아 제천성 공략에 나섰다. 안승우는 직접 화약을 넣으며 전투를 독려했으나 갑자기 내린 비로 의병들의 화승총이 물에 젖어 쓸 수 없었다. 결국 안승우는 적의 탄환에 맞아 32살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김백선에게는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1968년 대통령표창)이, 안승우에게는 1962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심철기 한밭대 교수가 원주 안창리에 위치한 을미의병 봉기 기념탑 앞에서 설명을 이어가고 있다. 정민엽 기자
■왜 원창이었을까
원주 을미의병이 원창에서 거의한 배경에는 학연·혈연·지연이 모두 얽혀 있다. 의병 관련 연구와 강연을 이어오고 있는 심철기 한밭대 교수는 “구한말까지만 해도 안창은 나루터가 있고, 시장이 있고, 원주관아까지 가는 세금을 모아두는 창고도 있었다. 교통의 측면에서도 서울에서 임명된 강원관찰사가 원주까지 내려가는 길이 있던 곳”이라며 원창이 당시 중심지였음을 강조했다.
이어 심 교수는 “또한 원주 을미의병을 주도한 이춘영의 처가가 안창에 있었다. 그의 처가는 연안 김씨 가문으로, 당시 영향력이 상당했다”면서 “양평 지역 세력과 원주 세력이 만나 거의하기 좋은 조건을 가진 곳이 원창이었다”라고 말했다.
또한 원주 을미의병이 원창에서 거의한 배경에는 당시 지평군수였던 맹영재의 완강한 반대가 존재한다. 당초 김백선과 인연이 있던 맹영재는 김백선이 함께 의병활동에 나설 것을 제안했으나 이를 거절했다. 맹영재는 개화파의 어윤중과 친하게 지내던 터라 의병을 일으킬 수 없었다.
결국 반대에 부딪힌 이들은 장소를 옮겨 이춘영의 장인인 김응수가 군비를 마련 중이던 안창을 근거지로 삼았다.
■관점 바꿔 원주 을미의병 재조명해야
원주 을미의병은 초기 강원의병의 중심을 이루는 세 축(춘천·원주·강릉) 중 하나임에도 현재 원주 지역 내에서의 선양사업이나 연구는 활발하지 못한 실정이다.
이에 대해 연세대 미래캠퍼스에서 25년 넘게 후학 양성에 힘써 온 왕현종 교수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의 10여 년 동안은 원주지역 의병에 대한 연구가 굉장히 활발했다”면서 “원주 을미의병은 규모와 시기면에서 같은 시기 발생한 춘천의병보다 앞섰다. 요동지역으로의 망명을 고민 중이던 의암 유인석이 생각을 바꿔 국내에서 의병활동을 이어가게 된 배경에도 원주지역 의병이 있다”면서 역사적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어 왕 교수는 전국적으로도 원주 을미의병의 가치가 저평가 된 데 대해 “제천의병이 있기 전 주요 부대는 원주의병이었고, 이러한 흐름 의암 유인석의 투쟁을 이끌어 냈다. 이후로도 1905년, 1907년에도 차례대로 의병이 발생했다. 결국 원주권 의병은 13군 창의군의 모태가 됐다고 볼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원주 을미병은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다.
왕현종 교수는 ‘호서의병’이라는 용어에 대해서도 용어를 바꿀 필요성을 역설했다. 그는 “다른 지역에서 발생한 의병항쟁의 공을 뺏으려는 뜻에서 말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현재는 학계에서 ‘제천의병’이나 ‘호서의진’ 등의 용어를 많이 쓰는데, 이는 결국 의병의 활동지를 충청 지역으로 제한하는 것”이라며 “그러나 이는 사실과 다르다. 당시 의병들의 활동지는 제천과 충주 뿐만 아니라 원주도 포함됐다. 충청도에 국한된 의병이 아니기에 명칭에 문제가 있다. 포괄적인 측면에서 용어를 다시 정립해야 한다”고 말했다.
정민엽 기자 jmy4096@kado.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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